「歯車一筋 小原富蔵の歩んだ道」本文韓国語

제1화 –
장남으로서 탄생

인생은, 회전하고 있는 톱니바퀴와 같다고 한다.
사람들은 다양한 여러상태의 동기로 서로 맞물려, 새로운 에너지가 태어나 전달되어 새로운 인생이 태어난다.
아침에 태양은 동쪽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저녁에는 서쪽으로 잠겨 간다.
휴일없이 계속 되는 지구의 자전을 우주와의 톱니바퀴라면, 국가는 지구와의, 개인은 사회와의, 이것 또한 휴일을 모르고 회전하는 톱니바퀴이다. 큰 기어 사이에 맡물린 작은 기어, 평기어, 베벨기어, 스파이럴 기어, 웜·호일등—인생은 각각의 역사처럼 다양한 기어와 함께 돌아가고 있다.

코하라하구루마공업 주식회사의 창업자·오하라 토미쿠라는 1966년 7월 26일 오전 영시 54분 , 그 생애를 닫았다.향년 59세였다.
생전, 토미쿠라의 취임한 공직 및 직무를 소개하자면, 카와구치 기계공업 협동조합 이사장, 동교통 안전 협회 부회장 겸 이사장, 카와구치 상공회의소 부총재, 사이타마현 기계공업 단체 연합 회장, 일본 기어공업회 상임 이사를 시작해 22의 많은공직에 임해왔다.

59년의 생애는, 한 걸음, 한 걸음, 계속해서 걸은 확고한 발자국에 비하면, 정말로 짧은 인생 이었다. 그 세월중 46년간은 카와구치에 살면서, 32연간 실업계에 몸을 바쳐 왔습니다. 문자 그대로 다양한 기어와 서로 맞물려, 그 인생의 길을 기어의 발전에 모든 힘을 바친 고귀한 일생이었다.
1906년 10월4일, 오하라 토미쿠라는 아버지·쇼조, 어머니·봄의 장남으로서 도쿄 시외 카나스기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1906년 이라는 시대를 되돌아 보면, 전년 1905년에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한 가운데 종결하였다.즉, 일본이 근대국가로서 세계의 열강에 참가하는 주춧돌을 만들었던 시대로서도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메이지 1905년 1월 중국의 료준을, 3월에는 호우텐을 완전장악 했으며, 5월에는 토고원수가 러시아·바르틱크 함대를 격파하는 승전을 올렸습니다.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러일 강화 조약」이 맺어진 것은 토미쿠라가 태어나기 1년전의 1905년 10월 14일이었다.
토미쿠라가 태어난 다음달 1906년 11월 26일은 만주 철도의 설정이 경정 되었으며.후년인 1907년에는 미국 각지에서 배일 운동이 일어났다.
동양의 한섬나라로에서 근대국가에의 탈피에 성공한 일본은 여러나라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토미쿠라의 아버지·쇼조는 시타야의 카나스기에서 떡집을 운영을 하고 있었으며, 어머니·하루는 이타바시·니시다이의 부자집의 농부의 출신으로, 친가의 도움으로 쇼조는 장사를 시작했던 것이었다.
「구슬과 같은 사내 아이예요」―――주의사람의 통지로 장남의 탄생을 알려바든 아버지·쇼조는 「사내 아이라면 나라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라고하며 기쁨을 달랬습니다.
후계자의 출생으로 아버지로서의 자각에 눈을 뜬 쇼조는 장사에도 보다 많은 노력과 정신을 쏟았다. 「카나스기의 찹쌀떡은 정말 맛있다!」라고 소문이 퍼질정도로 유명떡집이 되어, 장사는 순조롭게 성장을 하여, 사원의 수도 늘어 활기에 넘친 나날을 보냈다.

– 제2화 –
이야기 갑작스런 어머니의 사망

사소한 계기가 인생 톱니바퀴의 회전을 틀어지게 한다. 사람을 매우 좋아한 쇼조는, 아는 사람의 권유로 투기적인 거래에 손을 대어 속임을 당해 실패를 한다.
몇번이나 손을 끊으려 한 쇼조였지만, 원래대로 돌아가기엔 너무도 늦어진 사태로 최악의 곳까지 몰려 도산을 당한다.
전쟁에 승리를 하여 활기를 띠는 사회 분위기와는 반대로, 쇼조에 있어서는 예상외로 일어난 일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1910년, 쇼조·토미쿠라의 가족에 있어서는 생각조차 하고 있지않은 사건에 휩쓸렸던 것이었다. 당시 토미쿠라는 4살 이었다.

이 해, 8월에 들어, 계속 내린 장마의 비는 10일간이 되어도 그치지 않고, 많은 호우로 로크고 강의 제방이 무너져 버려 아라강이 범람하여, 당시의 도쿄시의 게노마치, 혼죠, 후카가와로부터 아사쿠사, 무코지마 일대가 전부 침수가 되어 버린다.
당시의 기록을 조사해 보면「침수의 수량이 약8m 40Cm」라고 되어있다. 아야세 강을 비롯해 13개소의 제방이 무너져 버려 미나미 아다치군, 이타바시, 시무라의 일대도 침수가 되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라고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 수해로 사망자도 45명에 이르렀다.

불행하게도 사망자 안에는 토미쿠라의 어머니·하루의 이름도 있었다.
너무나 큰 쇼크를 받은 아버지·쇼조는 아내의 사체를 짊어지고 넉빠진 모습으로 아라강에서 이타바시의 친가·야마구치가까지의 먼길을 사체를 옮겼다고 한다.
이것은 4살인 토미쿠라에 있어서는 호우뒤에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과 같이, 선명 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하나로 남아있었다.

– 제3화 –
아버지와의 별거 생활

4살이 된지 얼마 안되어 어머니가 사망하게 되었다. 아직 어린 토미쿠라에 있어서는 너무나 큰 운명의 장난이며, 큰 시련이기도 했다.
토미쿠라는 그날 이후로 어머니란 단어를 부르지도 못하고 자라게 되며, 여러 가혹한 어릴 때 체험은 토미쿠라의 인생을 일변시키게 된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와의 별거 생활이었다. 도산 후, 아버지는 미나미센주에서 가발가게를 하게 되지만, 장사가 않된 가발가게는 곧 문을닫게 되고, 그후 친구의 소개로 도쿄 제국대학의 부속 병원의 방문객이 벗어놓은 신발을 정리하는 일로 취직하게 되었다.
이 직업은 심야 근무가 있는 등 시간적으로 불규칙하기 때문에, 어린 토미쿠라를 곁에 두고 돌볼수 없었다. 토미쿠라는 사타이타바시에 사는 조부·야마구치 히사시에게 거두어져 양육되게 된다.
”부모는 없어도 아이는 자란다”조부의 아래에서 토미쿠라는 순조롭게 성장해 갔다. 당시 , 아버지·쇼조는 도쿄·시타야에 있는 형의 집에 기숙을 하며 제국대학 병원에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시타야와 조부의 집 이타바시 까지는 지금과 같이 교통 수단의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토미쿠라를 만나러 올수 있었던 것은 년 몇차례 뿐이였다.

토미쿠라에 있어서 아버지는 단 한 명의 육친이었지만, 년 몋차례 뿐이 만날수 없어기에 막상 「아버지 란다」라고 해도 어색했을 뿐이였다.「아버지」라고 큰 소리로 부르지도 않았으며, 응석을 부리는 방법도 몰을 정도였다. 반대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면 도망가 버리는 아이였다.

토미쿠라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은 손을 댈수도 없을 정도의 장난꾸러기의 어린이로 자란게 된다. 장난이 심한 아이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초등학교의 성적은 좋았으며, 1학년때는 반장을 할정도로 성적면에서는 우등생이었다. 특히 산수가 자신있었으며 언제나 성적은「수」이었다. 이것은 후년, 독학으로 ”오하라식 부기”를 독자적으로 짜내어, 경영에 큰 도움을 주게된다.

조부·히사시는 교육에 대해선 엄격하고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토미쿠라는 이 조부의 눈을 피해 여러 장난으로 소란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의 에피소드으 하나로서 인가의 따님과의 싸움사건이 남아있다.

그 따님은 당시 16살, 초등학생이 된지 얼마안된 토미쿠라에 비하면 어른이었던 인가의 따님에게 여러차례 걸쳐 심한 장난을 치게되고, 그 장난을 결국 참지못한 따님은 매를 들어 토미쿠라를 꾸중을 하게 된다. 토미쿠라는 그 꾸중에 대해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어느날, 밤이 깊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잠에든 따님의 방에 준비한 주먹만한 돌을 던져 소란을 피우게 되지만, 곧 발각이 되어 조부로 부터 심한 벌을 받게된다.
그 당시 토미쿠라의 작은 마음에는「아버지」,「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부모가 가깝운 곳에 없는 슬픔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며,「왜 나만 엄마가 없는 것이야」―――누군가 상냥하게 말을걸어 주는 사람과 자기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어린 토미쿠라에 있어서는 육친의 애정이 필요했던 것이었으며, 인가의 따님에게는 혼나면서도 장난을 걸었던 것도 그 따님에게서 어머니의 이미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심야의 소란을 일으킨 것도 모두에게 관심을 끌기위한 것이었으며—.외롭움을 달래기위한 하나의 방법이었기도 했다.

-제4화-
고생을 잊게한
아버지와의 생활

이윽고, 육친의 정을 받을수 있는 날이 토미죠우에게 돌아온다. 그것은 1915년의 8월의 저녁노을이 질때였다.
이타바시역 개찰구에서 「도쿄행은 어디에서 탑니까?」라고 역무원에 묻는 소년이 있었다.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소지금을 묻는 역무원에게「9전 가지고 있어요」라고 소년은 대답했다.
그 소년이야말로, 헤어진 부친의 뒤를 쫓으려고 한 토미죠우였다.

토미죠우가 없어진 것을 금새 눈치챈 조부는 토미죠우를 금새 찾아내어 집으로 데리고 돌아 오게되지만, 토미죠우는 그 날 밤새도록「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다」라고 울며 지새웠다. 그 강한 의지에 놀란 조부는, 더 이상 혼자 두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다.
그 후 백부의 허락으로 시타야의 백부의 집에서 아버지와 생활하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토미죠우는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백부는 시타야에서 당시, 쌀집과 군고구마가게를 경영하고 있었다.겨우 아버지와 다시살게 되었지만 3평 정도의 방에서 생활하는 식객의 생활이었다. 하물며 당시는 심각한 불황의 무렵 있었기에 백부 일가의 생활도 결코 편하지 않았다.

토미죠우도 학교로에서 돌아오면 아기를 보는일을 비롯하여, 고구마 씻는 일, 쌀의 배달등 여러 일을 도왔다.
그것은,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었기에 해 나아갈수 있었으며, 또한, 열심히 일을 도우면 두 번 다시 아버지와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 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토미죠우에 대해서 사촌동생인 코하라 카네오씨(전 코하라 하구루마공업(주)전무 이사)는 「토미죠우는 아버지가 집에 오고 나서 열심히 일을 도왔습니다. 이것은 후년 본인의 가슴 속 깊이 남아 있었다고 말했습으며, 결국 자신은 어머니와 어린 시절에 사별해 아버지와도 함께 생활 할 수 없었기에 어린 생각에도 인생은 뭐니뭐니해도 경제력이 최고라고 생각한 토미죠우 였으며, 그 경제력의 철학을 위해서는 인내와 노력이 중요하다고 하는 교훈을 그 당시 느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철학은 그 후에도 교훈이 되어 스스로 독립해 회사를 일으킨 후에도 강한 용수철이 되어서 움직일수 있었다라고 말했다고」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토미죠우소년의 작은 톱니바퀴가, 사회의 거센 파도와 몸을 가지고 조금씩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니시다이의 초등학교에서 카나스기의 초등학교에 전학을 한 토미죠우의 성적은 조금 떨어졌지만 이유없이 반항하는 성격등은 조금씩 고쳐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성의 정의감,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볌함이 없었습니다.

근처에 있는 안라쿠지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 그곳의 아이는 중학생이었지만,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토미죠우에게 늘 싸움을 걸어왔다. 가끔은 대응하기도 했지만, 체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갓난아기를 짊어진 핸디캡으로 토미죠우는 전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나이가 어리고 게다가 아이를 보고 있는 자신이 시달릴 이유가 없다」라고 “정의의 신조”가 불타 올랐으며, 게다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마침네 폭팔하여 복수를 결정하게 된다. 어느 날 밤부터 통나무를 가지고 절에 나가 기다리게 되지만 학교의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은 그 날 이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의감이 강하고 노력가이며, 완고의 사람으로서 알려진 토미죠우를 전하는 초등학교 시절의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체력도 강인한 사람이었다. 코하라 카네오씨는 「그 당시 아직 초등학생이었지만 두대의 쌀더미를 짊어지고 시타야에서 오우지까지 배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라고 추억을 더듬었습니다. 두대의 쌀더미 이라고 하면 지금의 자신 체중과 거의 같은 무게였습니다.
후년, 실업가로서 성공 요인이 되는 노력, 불굴의 정신이 이때부터 조금씩 단련 되었다고 생각 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아직 토미죠우는 소년이었다. 친구들과 노는 용돈도 갖고 싶었고, 학용품을 사는 돈도 필요했다. 그럴 때마다, 토미죠우는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시계는 밤7시, 8시가 지나고 있었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낮의 피로로 토미죠우는 꾸벅꾸벅 졸음이 왔고「내일 아침, 아버지보다 일찍 일어나자」라고 잠자리에 들지만, 토미죠우가 일어났을 때는 벌써 아버지가 출근하고 없을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가끔은 아버지보다 일찍일어나 아버지를 깨우기도 했다. 10전, 15전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을수도 있었으며, 어린 토미죠우는 무엇보다도 기뻤다. 단지 용돈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 자체보다 부자가 같이 생활하고 있는 것을 실감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버지에게는 어린이답게 응석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도 했다.

– 제5화 –
카와구치의 철공소에 봉공

1919년 3월, 토미죠우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백부의 집에서 쪽겨나오게 되어, 아버지와 함께 3평의 작은 방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토미죠우에 있어서는 중학교의 진학은 꿈에도 생각 할수조차 없었다.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고용 살이로 나갈수 밖에 없었다.

1919년를 살펴보면,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으로 발단해, 유럽 전 국토, 일본까지 참전해 5년간 계속 된 제1차 세계 대전이 파리 평화 회의를 거쳐 독일 항복의 형태로 종전이 된 해이다.

일본은 직접적으로 큰 전쟁에는 말려들지 않았지만, 교전국으로 부터의 군수품의 주문은 증가했으며 또한, 전쟁중에는 교전국의 수출품이 중단된 틈을 이용해 제품이 세계 각지, 특히 아시아 시장에 빠르게 진출하게 되어 반대로 일본은 호경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물품 중에서도 직물, 선박, 철, 기계의 생산이 급증했다.
이런 세상의 경기를 생각한 아버지 쇼조는 졸업이 가까워진 토미죠우를 불러 「지금부터는 물건을 만드는 시대다. 상인이 되는 것보다도 손에 기술을 익히는 것이 좋다」라고 하며, 카와구치에 가도록 권유를 했다.

카와구치에는 코하라철공소 라고하는 아버지의 사촌동생이 경영하는 공장이 있었으며, 직공도 40에서 50명의 큰 공장있었다.
카와구치는 도쿄와도 인접해 있었으며, 주물생산의 주요 도시이었기에 열심히 기술을 몸에 익혀 두면 앞으로의 장래는 편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아버지 쇼조는 확신을 하고 말하고 있었다.

토미죠우는 체력에도 자신이 있었으며, 또한 인내력도 누구보다도 강했다. 「지금부터는 만드는 시대」라고 하는 아버지의 말에 간단히 수긍해, 46년간 토미죠우 생애의 대부분을 카와구치에서 보내게 되며, 카와구치와의 운명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토미죠우가 코하라철공소의 문을 두두리게 된것은 1919년 4월 24일, 12세 때였다.
당시의 카와구치는”주물의 마을”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의 1916년경 부터는 카와구치 내에서 기계 업자의 창립이 눈에 띄게 늘어 났으며, 매년 다섯회사에서 열회사로 빠르게 늘어 나며 발전을 해 나아갔다.
코하라철공소는, 그 카와구치 안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뽑힐정도로 우수 공장이었으며, 제품의 주력은 수도관에 구멍내기이었다. 그 일부로서 기어의 제작을 조금식 실시하고 있었다.

제6화 –
엄격한 도제제도
중에서도

「하루라도 빨리 어엿한 직공이 될거야」라고 사회인의 제일보를 내디딘 토미죠우 였지만, 엄격한”도제제도”에 직면하게 된다.

이 도제제도란, 감독직공을 정점으로, 첫번째 직공, 두번째 직공과 같이 연공서열이 뚜렸하여 신인직공은 선배의 직공 일만을 도우면서 경험을 쌓을수 밖에 없는 엄격한 제도였습니다.

불덩어리와 같은 철강을 선배직공이 쇠망치로 칠수 있도록 그 말단을 누르고 있는 것이 신인제자의 역할이었다. 이것도 요령이 있었고, 가끔 누르고 있던 철강을 놓치게 되면 불활이 날아올 정도 몹시 꾸중을 받았으며, 때로는 주먹으로 얻어 맞기도 하였다. 정말로 엄겨하고 괴로운 수련이었다.

「이런 일은 싫다」라고 같이 고용살이를 하고있던 동료중에서도 도중에 도망을 친 동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토미죠우는 「참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그 길이 열린다」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많은 실현과 경험을 쌓은 토미죠우는 이러한 일로는 강한 인내력이 꺽이지 않았다.

식사와 목욕하기에도 엄격한 서열은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면 먼저 공장감독, 그 다음으로 첫번째 직공, 두번째 직공의 순으로 차례가 되었으며, 겨우 신인지공의 차례가 오게되지만, 밥과 국은 벌써 차져서 겨우 먹을정도 였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겨우 목욕을 할 수 있어도 욕탕의 뜨거운 물은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에 미지근해져서 하루의 피로조차 풀수 없었던 잔혹한 수련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토미죠우는 천성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누구보다도 참고 노력을 해 나아갔습니다.

토미죠우에 대해서 코하라 가네오씨는「카와구치에 고용살이를 하러 나와 매월 1일과 15일의 휴일에는 반드시 찾아 주었으며, 그 당시는 별로 월급를 받지 못 했을 때 였지만, 나에게 노트와 연필을 사 주었으며, 사람에게 대한 배려는 어릴 때부터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하라 가네오씨는 그 무렵의 토미죠우에 대한 선명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관동 평야를 공포와 혼란으로 힙쌀린 관동 대지진이다.
「그 날은 휴일이었기 때문에 시타야의 집에 놀러 와 있었습니다. 흔들흔들 대단한 진동이 오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집이 무너져 버려, 토미죠우는 일순간에 무너진 집의 기둥에 깔려 갇혀 버렸지만, 그 후 강한 여진이 와서 그 흔들림으로 기둥에 틈이 생겨 겨우 살아남을수 있었다.
다행히도 화재가 나지 않았고, 여진이 없었으면 살아남을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7화 –
철공소에서 익힌
인생철학

코하라철공소의 그 시대에는 월급제의 세도가 없이 용돈으로 한달에 50전이었고, 한사람 목의 직공에 가까워 지면 월 3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엿한 직공이 되어 기술자가 되면 기술감독의 승인이 내려지게 되어 일급제가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봉건적인 도제제도였지만, 토미죠우는 다양한 기술과 일을 익히게 된다.

그 당시 선배 기술자에게 맞아 가며 몸에익힌 것은「일이란, 단지 주어진 일만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절차까지 앞을 읽으면서 일을 해 나아가면 늘 날아 오는 불화살의 꾸지람도 없어진다」라고 하는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후년, 경영자의 입장이 되고 나서 앞을 읽는 판단력의 기초로 되어진다.
또한, 기술이란 정확하게 원리로부터 이해하지 않으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철칙을 배웠으며, 어중간하게 기술을 익혀 제품을 만들면, 결국 완성되어 오는 제품도 어중간 하게 되어 버린다. 그 제품은 한때는 견딜 수 있어도 반드시 반품이 나오고, 제일 중요한 것은 신뢰를 잃게 된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었다. ”인간 관계”이다. 일만을 한결같이 몰두하는 것도 좋지만 동료와의 관계에 있어서 신용과 신뢰를 받지 못하면 결국에는 위에서서 리드하는 인간으로는 성장될수 없다.

후지이 미츠오씨(코하라철공소에서 토미죠우의 제자로 현재, 코하라하구루마공업(주)의 연삭작업 담당)는 「기술자로서의 기술은 감독에게도 신뢰의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누구보다도 앞에 앞을 내다보며 사물을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젊었을 때는 그렇게 대담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무엇인가 일을 시작할 때에는 자신 혼자서 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동료에게 실뢰를 받으며 일을 진행하는 것이 매우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새 인가 동료의 선두에 서서 일을 진행해 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좋아했으며, 새로운 기계가 들어오면, 그 기계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서야 깨닳은 것입니다만, 젊은 시대에 제대로 기초를 배웠으므로, 지금 낡은 기계의 개조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있다. 젊은 무렵의 수련이 후년 회사를 만드는 단계에서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고 사장은 이야기하고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 제8화 –
“독립“을 위한
새로운 목표를 향해

1926년, 만 스무살이 된 토미죠우는 병역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 당시는세계의 나라가 군축을 위해 힘을 기울였던 때였다. 하지만 토미죠우는 기술생으로 특별 합격하게 되어 병역감면을 받았다.
이 때에 공장감독으로부터 직공의 승인을 정식으로 받았다.

코하라 철공소에 들어간지 8년간의 세월이 흘렀다. 생각하면 힘든 노동생활의 청춘이었다. 토미죠우는 기술자로서 완전히 성장해 훌륭히 한사람 목을 해내는 직공으로 성장해 있었다.

어여한 직공이 된 토미죠우는 ”독립”이라고 하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목표를 세우고 일을 하면서 또 2년이 흘러갔다.
「이제는 기술자로서 한사람의 목을하는 여여한 직공이야」라고 하는 자각이 가슴안에 늘 자리잡고 있었으며, 아무리 괴롭고 힘이 들어도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소망이 가슴 한쪽 구석을 꽉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독립하면, 이런 경영으로 방침으로 이러한 물품을 만들어 보겠다」라고 당시 부지런히 일을 하면서도 항상 이러한 독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을 하기위해서는 시기가 너무나 나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2, 3년계속 된 호경기도 비눗방울과 같이 사라졌다.

당시의 신문기록에 의하면, 1920년 봄에 불황에 돌입,1927년에는 금융 공황, 2년 후의 1929년에는 뉴욕의 주가폭락으로 발단 해 온세상이 대불황의 소용돌이안에 말려들고 있었다.

카와구치의 주물 업계에서도 1918년에 신철의 가격이 톤당 4백6엔의 인플레 가격을 기록한 후, 점차 경기는 후퇴해, 10년간 심각한 장기 불황이었다.
당시, 카와구치의 주물 업계도 대기업 회사의 하청의 받아 손존하는수 밖에 없어으며, 대기업이 가지고 있는 기술과 설비력에는 큰 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기술자의 기술하나만으로 견더낼수 밖에 없었던 시대이었다.
그런 만큼 청년이었던 토미죠우는 「어떻게든 독립하지 않으면 않되」라고 소망이 보다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제9화 –
흔들리는 심정.

22살이 조금 지났을 무렵, 토미죠우는 심한 두통으로 시달리게 된다.
「어딘가 몸이 나쁜 것인지? 병원에 가봐」라고 공장감독이 말했지만,
「괜찮습니다.하루만 쉬면 고쳐지겠지요」라고 대답하고 상태를 보았지만, 두통은 한층 더 심해졌다. 결국, 공장감독의 권유로 부친이 근무하고 있는 제국대학의 부속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지만 원인을 알수가 없었다.

코하라 카네오씨는 「당시, 쉬는날에 돌아오게 되면 머리가 아프다고 종종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디가 어떻게 나쁜 것인지 분명치 않았으며.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신경쇠약, 현대로 말하자면 노이로제가 아니었든가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에 대한 욕구 불만과 걱정이 점점 심해진 탓이 아니었던가」라고 말하고 있다.

누구나 스무살이 지나면서 자신의 진로와 어떤 가정을 가지고 싶은가등 장래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토미죠우는 일만을 아는 너무나 성실한 사람이었다. 이런 불안을 가지고 같은 일만을 몰두하게 되면 더욱더 두통이 악화 되기 때문에, 기분 전환으로 서비스업도 조금 해 보지 않겠는가」라고 권유를 하는 사람도 있어 토미죠우는 생각한 나머지 공장을 그만두기로 결심을 한다.

인생의 사계로 말하면 봄을 지나 새잎도 깊은 초록이 될 경에 장마철에 접어들었다고 비유 할 수 있을것이다.
토미죠우는 결심한 끝에 공장을 그만두고, 카나스기의 어류라고 하는 생선가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철공장과 생선가게는 너무나 다른 직업이었다. 직공을 단념했으니, 생선가게에서 부엌칼의 사용법을 익혀, 장래에는 스시식당을 해 보려는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생선가게 이었지만 매장에서 판매를 할 뿐만 아니라, 생선의 매입과, 주문을 받기위한 영업도 나가기도 하는 여러일을 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신기하게도 생선가게에 근무하고 나서는 욱신욱신 하는 두통도 거짓말과 처럼 사라졌다. 심기 일전, 재출발 인생이 시작했기 때문이다.

야나카, 네기시의 고급 주택가를 다니며 영업을 해 생선회의 주문을 받으면 20% 정도의 마진이 손에 들어 왔다. 무슨일이라도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을 해 나아갔다.
그러나, 큰 벽이 토미죠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겨울”이었다.
생선가게라고 하는 장사는 연중 물을 사용한다. 그 때문에 손이 동상으로 부어올라 피부병이 되어 버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벽에 부디쳐, 끝내 토미죠우는 생선가게 장사를 반년으로 짧게 막을 내리지 않으면 않되었다.

– 제10화 –
장래에 도움이 된
귀중한 체험.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토미죠우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고민끝에「여행을 떠나서 생각해 보자」라고 무작정 도쿄역으로 향했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증발”이라고도 할수있었다.

전 재산 20엔의 돈이 있었기에 반달 정도는 버틸수 있는 금액 이었기에 우선「나고야까지 가 보자」라고 생각하고 표를 샀다.
특별하게 나고야에 도착해도 앞의 행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기술이라곤 철공소에서 익힌 기술뿐이었다.
낯선 토지에서 통용이 될까 하고 걱정은 있었지만, 일단 승부를 걸어볼 작정이었다.

당시의 토카이도선은 현재는 신칸센으로는 나고야까지 2시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급행이라 해도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익숙하지 않은 여행에 지쳐 꾸벅꾸벅 졸고 있었을때, 「하마마츠!」 「하마마츠!」라고 역무원이 목소리가 들렸왔다.
「잠시만, 하마마츠도 카와구치와 같은 공업의 마을 이었지」라고 생각나 목적지와는 다른 카와구치 역에 내리게 되었다.

하마마츠에서 토미죠우는 하루내내 일을 찾아 다녔지만, 심한 불황으로 큰소란이 일어날 정도 있었기에 실업자가 마을에 넘치고 있었다.
「도저히 하마마츠에서는 일자리를 얻을수 없다」라고 생각한 토미죠우는 원래의 목적지인 나고야로 향했다.

나고야는 하마마츠, 카와구치에 비하면 대도시의 느낌이 있었지만 초행인 지라 지리를 젼혀몰라 우선 시내의 싸구려 여인숙에 묵으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장을 찿아 다녔다. 하루, 이틀이 지나, 2주가 경과해도 일자리를 찾을수가 없었다. 가져 온 돈도 나날이 줄어들어 거의 무일푼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버렸다.
도쿄에 돌아가는 여비조차도 없었던 그때, 「나의 운명도 여기까지인가…」라고 토미죠우는 나고야시 교외의 논에 누워 가라앉는 태양을 멍하니 쳐다보며 큰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때였다—.
「왜 이런 곳에서 멍하니 누워있는 것입니까」라고 말을 걸어온 사람 사람이 있었다.
토미죠우는 카와구치 철공소를 비롯하여 생선가게, 왜 나고야까지 왔는지를 단번에 말을 걸어온 직공풍의 사람에게 고백했다. 짚이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 알았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실력이 있다면 내가 알아봐 주지」 「진짜입니까!」
「잘 아는 직공소가 있으니까 네게 맡겨」「고맙습니다」
낯선 토지에서 낯선 사람이 건내준 그 말이 너무나 고맙고 기쁜 나머지 가슴이 뭉클 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낯선 남자가 데려다 준 것은 시내의 작은 공장이었다. 토미죠우는 두통의 병이래, 약 7개월이나 해머를 잡지 않아 조금은 걱정 스러웠지만, 일단은 일을 하루래도 빨리 시작하지 않으면 않되었으며, 또한, 이 일자리를 소개를 해준 그 남자에게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 반면, 카와구치의 코하라철공소에서 단련해 온 직공으로서 부끄러운 일은 할 수 없다라고 마음 한구석에 기술자의 고집도 자리잡고 있었다.

일단, 임시 직으로 일을 시작한 토미죠우는 금새 소문이 날 정도의 일을 해 나아갔다. 「이번에 도쿄에서 온 남자의 일을 봐라」 「이것이야 말로 일등 기술자의 솜씨이다」라고-――금새 토미죠우는 주위로부터 호평을 받는 기술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 공장에서 토미죠우는 일급 1엔 6십전으로 일을하고 있었지만, 작은 공장이었기에 10일 남짓에 임시의 일은 끝나 버렸다.

이처럼 직공의 세계는 기술만 확실하면 식게는 곤란하지 않았다.
「소문을 들은 다른 직공소에서 일급 1엔 80전 줄테닌까 일해 줘」라고 곧바로 다음의 일이 들어 왔다.
이렇게 하여, 나고야에서는 1년간 몇개의 공장을 옴기면서 일을 해냈다.
나고야의 1년간의 수확은 아주 컸다.
인간은 떨어지는 곳까지 떨어져 버리면 「어떻게라도 될 수 있다」라고 새삼 느끼게 되고, 특히나 낯선 곳이라도 ”기술”하나만 있으면 일을 해 나갈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여러가지로 이 1년간의 경험은 인생에 있어서 큰 경험이 되었다.

미즈노 노보루(코하라 하구루마공업(주)계장)
「나는 선대 사장의 최초의 제자 였습니다. 토미죠우의 기술은 누구 보다도 뛰어 났으며 자랑할만한 것이었다.”감독”이라고 하는 단어가 꼭 맞는 사람으로 언제나 선두에 서서 열심히 일을 해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신입사원인 나는 여러가지의 일을 배울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토미죠우의 인생은 「떨어 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철과의 인생이다」라고 확신을 하고 한 길로만 전념을 해왔기에 지금의 코하라하구루마가 있을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토미죠우의 일년남짓의 실종은 부친, 친구, 동료들에게 많은 걱정을 끼쳤다.

코하라 가네오씨는 「돌연변 없어져버려 정말로 깜짝 놀랐고, 걱정했습니다.불황의 시대였으므로, 여러 가지로 무서운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을 때이었습니다 ”인신 매매자”에게 팔려가지 않았을까,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홋카이도의 탄광에 팔려간 것은 아닌가”등 모두들 많은 걱정했습니다」라고 당시의 추억을 말하고 있다.

공업이 번성한 나라 독일에는 19세기경 부터 어느 일정한 연령에 이르면 청년직공은 방랑의 여행을 떠나는 습관이 있었다. 낯선 곳에서 견문하면서 타지역의 기술을 연마한다. 그야말로 독일다운 합리적인 생각이다.
일본에도 요리사의 세계는 현재에도, 부엌칼 한 개로 수업하는 습관이 있다. 불과 일년이었지만, 토미죠우도 이 같은 체험을 한 것이었다.

– 제11화 –
다시 카와구치로
돌아와 소장으로

그러나, 이때, 토미죠우의 거처를 겨우 알게된 부친에게 「병도 나은 것같으면 꼭 도쿄에 돌아와라」라고 편지가 여러번에 걸쳐 오게된다.

어쨌든 단 한 명의 육친이며, 몸도 좋아졌고, 자신도 붙었다. 여러모로 생각하면 나고야에 부지 남을 이유가 없다.

「좋아! 다시 카와구치에 돌아가서 동료와 함께 열심히 일해 볼거야」라고 토미죠우는 결심했다.

제12화 –
염원의 독립

이렇게 해 토미죠우는 다시 카와구치의 코하라 철공소에 돌아오게 된다.공백의 시간 이었지만, 주위의 누구 보다도 인간적으로 성장해 있었다. 일하는 태도도 달라 졌으며, 감독과 동료로 부터의 기대도 컸다.
토미죠우는 소장이 되어, 30세까지 코하라 철공소에서 일을 해 나아갔다. 애송이로서 들어온 것이 13세 있었으닌까 벌써 17년간의 세월이 흐른 것이 된다.

1935년1월 13일, 토미죠우의 염원인 독립을 하게되며, 카와구치시 니시키쵸에 코하라 기어공소를 창립하여 기어의 제조 가공을 하여 영업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 카와구치의 인구는 4만 6천명으로 늘어 났으며, 공장등도 증가해 공업도시로 발전해 나아가고 있었다. 토미죠우가 독립을 결심한 것은, 그런 시간의 흐름에 민감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토미죠우는 30세, 소장으로서 주위의 기대을 모으고 있던 것은 앞글에서 썼다. 공장장 에게도 귀여움을 받고 있었으며 지금의 시점에서는 불만은 없었다.
단지, ”평생의 일터”로서 장래를 나름대로 생각했을 때,”과연 이대로 좋은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때가 늘어나고 있었다.

또하나, 토미죠우 자신의 가정사정도 있었다.
토미죠우는 27세에 결혼해, 아버지와 함께 아카하네에 살고 있었다.토미죠우의 하루 일가는 아침 시간에 일어나 도시락을 지참하고 카와구치까지 전철로 다니고 있었으며, 하루의 일을 끝내고 다음날의 일을 준비하고 돌아오면 밤10시가 지난다. 즉 하루종일, 일해 계속해도 좀처럼 편안한 생활을 할수 없었다.
「이것은 왜 일까! 」라고 자문을 해 본다.
거기서 간신히 나온 결론은 「어차피 매일, 일을 할 것 이라면, 월급생활을 그만두고 독립 밖에 길은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거기서 공장장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기대에 어긋나는 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만, 나도 남자로서 인생의 승부를 위해, 독립을 하고 싶다」라고 신념을 고백했다.

공장장은 승락을 해 주었다. 동시에 카와구치시 니시키쵸의 오구마주공소의 한 구석을 빌려 공장을 시작했다. 공장이라고 해도 중소의 공장이 많았던 카와구치에서도 가장 작은 부류의 공장이다. 동력대로 기계를 빌려 아내와 함께 거기에 입주했다.
「겨우 자신의 성이 생겼다」―――.
토미죠우는 감개 무량했다. 그러나, 이 만족을 맛 볼수 있는 여유조차 없었다. 기계를 빌린 자금마저, 자기 자본이 아니였기 때문이었다.
이 자본은 주문을 주는 회사에게서 선불이라고 하는 형태로 내 준 빚이었다. 이 또한, 토미죠우의 성실한 인품을 보고 빌려 주었던 것이었다.
결국, 이 자본이 원금이 되어 오늘의 「코하라 하구루마공업 주식회사」의 초석이 되었다.

선반 등 설비를 구입해, 직공을 두 명 고용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생사가 달린 인생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제는 토미죠우를 더이상 감싸 주는 공장장도 없었으며, 월급을 주는 공장도 없으며, 남은것은 빚 뿐이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철야를 가리지 않고 일만을 전념했다.

당시, 코하라기어의 공장 소등이 언제나 심야 이었으며, 아침도 어느 공장 보다도 빨랐다. 아무리 독립해 자신이 공장장이 되어 책임감이 무거운 것은 아는바 이지만, 이런 생활을 연중 계속하면 수면부족과 과로로 머리가 멍하게 된다.
좁은 공장이며, 눈앞에는 위험한 선반기계들이 있기 때문에 한눈을 팔게 되면, 팔이 잘라 떨어나갈 위험성이 따르고 있었다.
「아무리 뿌리를 채워도 생명과 교환하면 소용없다」라고 토미죠우는 자각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은 밤5시에 일을 멈추어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이렇게 해 토미죠우는 2년간, 필사적으로 일을 해 나아갔다. 세월도 그를 도와 주었다. 당시 , 국내의 공업 생산은 활황이었으므로, 일하면 일할수록 돈이 되었고, 일도 그만큼 있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제13화 –
수요를 선취한
아이디어

1937년, 토미죠우의 코하라 기어공소는 150평의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게 된다. 공작기계도 증가하였으며, 직원수도 창업시의 10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성공을 할수 있었던 비결은 토미죠우가 기어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안목이 높았으며”아이디어”가 딱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디어는 선반에 사용하는 기어에 주목을한 것이었다.

그 당시 선반은 공작기계 중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또한, 중요한 기계의 하나였다. 특히, 군수제품을 중심으로 제조를 시작하면, 반드시 선반의 수요가 증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카와구치 시내에는 선반을 사용하는 공장은 많았지만 선반에 사용하는 기어의”규격”이 없었다.

6척 선반에서는 5등급으로 체인지를 할 수 있어야 했으며, 최저 20개의 변형 기어가 필요했다. 그러나 공장에서 사용하는 기어는 규격이 없이 그 공장에서 변형 제조하여 사용을 했었다.

토미죠우는, 규격을 통일하고 세트로 만들어 내면 어느 공장에서도 필요로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생산을 시작한다. 이것이 지금의 “KHK 표준기어”의 역사의 시작이라고 말할수 있다.

코하라 카네오씨는 「선반용 기어를 1세트 23매로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획기적인 것이었지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정도로 팔리고 또 팔려 나갔고, 선금을 가지고 와서 부탁을 해오는 사람도 많이 있었을 정도 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 제14화 –
공장의 피난

세계 2차대전으로 인해 토미죠우의 공장은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업면에서도 군감독하에 있었기어 관리면에서도 여러 규제를 받고 있었다.

또한, 1944년 도시는 B29 공습이 매일 일어나고 있었으며, 공업 도시인 카와구치도 군수품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에 거의 매일 공습을 받고 있었다.

위험을 느낀 시민들은 공장의 피난을 시작했고, 토미죠우도 「어디엔가 공장을 옮기지 않으면 위험하다」라고 생각을 하고 카와구치 시내로부터 4킬로 정도 떨어진 네기시라고 하는 곳의 산중턱에 장소를 결정하고 피난을 실시 하게된다.
토미죠우는 모든 힘을 쏟아 산의 경사면에 구멍을 파서 공장의 피난지를 준비 하였다. 피난지의 준비로 기진맥진이 되었을때, 전쟁은 끝이나게 되며 시민들도 카와구치로 돌아오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 여러가지의 불안은 있었지만 「지금부터 또 다시 새로운 것을 제작할수 있으며 자유로운 경쟁의 시대가 펼쳐진다」라고 나름대로 새로운 기분으로 카와구치의 공장에 돌아오게 된다.

공장에 돌아온 뒤 남은 재료를 모아 농기구와 일용품을 만들어 판매를 하여 전쟁후의 위기를 견뎌내게 된다.

제15화 –
기어 전문 메이커의
의욕에 도전

이렇게 전쟁후의 혼란기를 견디고 있을 때에, 전쟁에 참가했던 베테랑의 기술자들도 한 명, 두 명 공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으로 일손도 거의 모였으며 조금만 더 참으면 다시 기어를 생산 할수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만들어 노력하자」라고 토미죠우는 사원을 격려했다.

여러 물품이 부족하였을 시기 이었기에 뭐든지 만들면 팔리는 시대이었고, 생산을 한 제품도 금새 팔려나가 경기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1949년 4월에 개인 회사로부터 법인회사(코하라 하구루마공업 주식회사, 민생 기계 주식회사, 닛코 기계 주식회사의 3사)을 설립해, 그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모든 힘을 쏟아 열심히 회사를 경영 하였으며, 농기구류의 생산을 단념한 것은 1951년이었다. 그후 1952년에 3사이었던 회사를 「코하라 하구루마공업 주식회사」의 하나의 회사로 통합 했습니다.
그디어 기어외곬의 경영에 전념할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다.
새롭게 태어난 코하라 하구루마 공업에도 중요한 전환기가 찾아왔다.
오래전부터 체인지 기어에 착목한 토미죠우의 염원인 「카와구치에서 사용하는 기어는 전부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하고 싶다」것이었다.

하지만 벌써 카와구치라고 하는 특정 지역의 수요를 채울 뿐만 아니라, 관동지역 제일의 기어회사로 되어 있었으며, 전국적으로도 시장을 펼쳐 나아갔다.

반면, 여러 발상의 전환과 동시에, 생산 설비의 근대화, 양산 체제, 제품의 고정밀화, 균일화, Low cost화 등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이 산적해 있었다.

이나다 타쿠미 씨(코하라 하구루마공업의 상무이사)는 「나는 전의 회사에서 외주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 선대의 사장으로부터 체인지 기어의 실적을 기초로 더 많은 종류의 기어를 자사 제품으로서 만들어 판매하고 싶다. 협력해 주었으면 하는 권유를 받아 1947년에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이전의 전무(코하라 카네히로 씨)와 그 당시 함께 도심의 공구가게에 거의 매일 영업을 나가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층 더 「설비를 현대화 하기위해 1951년 미국의 대일 원조금의 차입을 신청했습니다. 그 차입의 수속이 매우 까다로웠으며 그 당시의 금액으로 80만엔 정도였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차입금의 허가가 내릴 때까지 약 1년이 걸렸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제16화 –
KHK 표준기어의
탄생과 확대

1951년 현재의 본사 공장이 있는 나카쵸에 철골 공장을 건설하여 선반용 체인지 기어 이외의 KHK 표준기어의 제품화를 계획.

1955년부터 제1차로 5년 계획을 세워 본사 공장내에 신공장의 건설 준비에 착수한다.

그 다음, 1960년에는 제2차로 3개년 계획으로 합리화 계획의 일환으로 1억 5천만엔의 설비 투자를 실시한다.

그 당시 같은 업계의 어느 공장 보다도 빨리 신제품으로 강한 치절삭 설비를 차례 차례로 도입 했으며, 1964년에는 대형 호브반등을 구입하여 생산과 수주체제 강화를 진행시켰다.

이전의 선반용 D·P평기어 이외에 「KHK 표준기어」로서, 평기어, 베벨기어, 웜·휠등을 제품화 하여 시장에 판매를 실시함과 동시에 대리점 판매 제도로 1962년에는 전국적인 판매 루트를 확립하였다.
회사의 이사이었던 이나다 타쿠미씨는 이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KHK 표준기어 라고해도 취급점의 판매자에게도 알려 지지않아 설명하는데도 대단히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영업 담당으로서 불안한 매일매일 이었습니다만, 선대의 사장은 일단 일을 맡기게 되면 모든것에 대해 부하를 밑고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 만큼은 사장의 지론이었다.

대기업, 중소기업의 일을 3분의1, 자사 제품3분의1이라고 하는 영업 방침을 하루라도 빨리 쌓아 올리고 싶었다.

KHK 표준기어가 정말로 시장에 침투하여 간 것은 1957년 이후부터 이었습니다. 판매점으로 부터 신뢰받기를 시작 하면서, 평기어, 베벨기어, 웜·호일 등 그 이외의 종류도 증가해 나갔습니다.

제품 개발의 방법은, 주문을 받고 있는 여러가지의 물건중에서 시장의 동향을 보아 어떤 제품을 유저가 바라고 있을까? 조사와 연구를 거듭하여 제품을 개발하여 자신있게 제품을 생산해 시장에 내 보냈습니다.
이 발상의 원점은 체인지 기어의 착상으로 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그밖의 요네하라 히데키씨(코하라 하구루마 공업(주) 제조부 차장)은 선대 사장의 당시의 영단을 이하와 같이 말하고 있다.

「1957년, 내가 입사했을 무렵은 설비도 아직 중고품이 주체 였습니다. KHK 표준기어가 시장에 알려짐과 동시에 새로운 기계와 정도가 높은 설비가 갖추어져 갔습니다.

카라츠 제작소의 기야시파(gear shaper), 일본 기계의 26-inch 호브반, 견등 철공의 KR600등, 지금에 있어서는 별 것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설비였습니다.

선대의 사장은”자신이 책임을 진다”라고 말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새로운 설비를 도입해 나아갔습니다.

설비의 도입은, 항상 최고의 것만을 도입 하였습니다. 그것이 메이커로서의”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글리손사(Gleason)의”하이포이드제네레이타 No.108(Hypoid Generator No.108)”, ”코니후렉스 No.108”그리고, 마그사(MAAG)의 ”SD32X”, 라이스 하우엘사(Reishauer)의”NZA연삭반”의 도입등 세계 최고급의 설비 도입의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차례 차례로 도입한 생산 설비의 충실과 KHK 표준기어의 개발로서,
코하라 하구루마공업은 전문 메이커로서 점차 그 위치를 굳치고 있었다.


– 제17화 –
전쟁후의 기어업계

여기서 전쟁후의 기어 업계와 코하라 하구루마공업과의 관련을 토미죠우 자신이 적은 기록(1966년 4월 발행·사이타마현 지정 표준 공장의 사장이 말하는「우리 회사의 중기 5개년 계획」으로부터)을 되돌아 보자.

코하라 하구루마공업이 기어 전문 메이커로서 약진을 왜 할 수 있었는지....그 일단을 알기위한 것이었다.
기어 제조업자에게는 특별히 대기업은 없다. 따라서 모든것이 중소기업으로 되어 있으며, 그 형태는 아래의 3개로 나누어진다
기어 가공만을 주체로서 생산하고 있다.
변속기, 감속기를 주체로서 생산하고 있다.
모든 재료로부터 완성부품으로서 일관하여 가공하고 있다.
코하라 하구루마공업의 경우, 1항에 해당된다.
즉, 치절삭 가공을 주체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산업의 하청 가공의 메이커이다. 그 때문에 경제의 변동에 의해서 수주량이 좌우된다.

코하라 하구루마공업의 경우는 1958년경 부터의 경기상승에 의해서 생산량이 늘어나며 경영자본이 증가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수주 산업이다.
그 때문에 생산계획은 단기는 물론,장기 전망도 할수가 없었다.
선대 사장 코하라 토미죠우가 경영자로서 우수한 점은 체인지 기어의 아이디어를 살린 KHK 표준기어의 개발과 동시에 생산조정을 세우기 어려운 기어 업계에서 착실하게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 생산과 설비의 투자를 컨트롤 한 점이었다.

1964년에 나카쵸의 공장이 완성의 제3차 계획도 세웠지만 실제로 이것은 중단되었다. 과잉의 설비투자 때문에 타인자본이 증가해 자기 자본율이 지극히 저하했기 때문이었다.

기어는 형상, 용도, 재질등에 의해서 분류되는 것처럼 가공방법이 다르며 설비 기계의 종류도 많다. 이러한 이유로 설비자금이 일반 가공업에 비교해 몇배더 걸린다. 그 만큼 조업도를 올리지 않으면 안되었으며,인권비와 고가의 자동화의 설비가 필요했으므로 차입금에 의존하는 경영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점에서 기업체질의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많은 차입금은 위험하다. 기업의 안정은 어디까지나 자기자본으로 운용되어야 한다. 최근 도산이 많은 것은 고액의 차입금이 발단이 되고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여 눈앞에 가까워진 제3차 계획을 중단했다.

1959부터 1961년의 코하라 하구루마공업은 자기 자본율이 22%가 되어 버렸다. 토미죠우는 설비도입의 계획을 중지했으며, 어렵게 세운 카와구치시 니시키쵸의 3층빌딩도 타인에게 빌려 주는 등 타인자본의 줄이기 위한 노력에 힘썼다.

여러 가지의 노력으로 자기 자본율을 1965년도에는 50%로 목표를 새울수가 있었으며,마침내 49%까지 도달할수 있었다. 자기자본이 충실하면 불량어음, 수취계정, 미회수등의 자금난도 해소 할수있다.
차입금이 많은 회사를 말하자면 반환자이다. 자기자본이 충실하면 약간의 불경기로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제18화 –
독학으로 배운
경영 철학

―――사실 그 감은 꼭 맞았 떨어졌다. 그 당시, 그대로 설비 투자를 계속하고 있었으면 오늘의 코하라 하구루마공업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업가로서 선견성을 갖고 경영자로서 독학으로 경리의 공부를 해, 독특한 경영 철학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라고 선대의 사장을 아는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이러한”신념”이 있어야만 할 수 있던 것은 아닐까 라고 다들 말하고 있다.

특히 독학으로 경영 철학을 배운 점에 대해서는 「당시, 손익 분석점경영, 계수 관리를 생각해 실행하고 있는 경영자는 카와구치에서는 적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그럼 그 경영 비전은 도대체 어떤 경영이었는가. 1959년에 발행한 「이렇게 하면 경영은 흑자가 된다」(카와구치 기계공업 협동조합간)중에서 그 요점을 적어보자.
1.일본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많은 격차는 있다. 예를 들어 임금이 대기업을 100이라고 하면 중소기업은 60이었으며, 영세 기업은 40에 지나지 않다. 중소기의 시장이 좁기 때문에 아무래도 과당경쟁이 될 뿐이다.
단가와 제품의 지불은 억망 이었다. 결국은 자신이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해 주지 않는 것이다. 즉「어떻게 하면 흑자가 될까」는 「어떻게 하면 적자를 내지 않는가」로 연결된다.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다르다. 그런 만큼 경영의 방식과 그 경영방침에 의해서 내용도 크게 달라진다.
2. 기업은 경영에 의해 준 이익을 어떻게 활용하는냐에 따라서 많이 다르다. 이익을 수반하지 않는 기업은 점점 쇠약해 나갈 수 밖에 없고, 그런 만큼 적자경영이 되고, 왜 적자가 되는지 그 병근을 없애지 않고서는 흑자를 낼수가 없다.
경영이란, ”산동물”같고, 가끔은 ”물”과도 같다. 여러가지 케이스를 그때마다, 적절히 판단하여 유효한 처치에 의해서 해결하는 것 외에는 방법은 없다. 여기에 경영자의 경영방침이 크게 좌우한다.
3. 적자가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익보다 비용이 많으면 적자. 수익이 조금 상회해도 파산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10만엔의 이익에 대해서 생각도 없이 백만엔, 2백만엔과 경쟁 의식에 불타 설비 투자하면 자금 부족을 일으키게 된다. 차입을 하면 좋지만 계획성이 있는지, 상당한 장기가 아니면 안된다. 경영이 어려워 문을 닫게되는 기업을 보면 10배, 20배의 부채가 있다.

나는 항상 제일의 경영으로 적자를 낼 리 없다.
그런데도 적자가 있다면 사원을 줄이거나 기업을 축소 할 수 밖에 없다.
또, 수익-비용=이익(손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정기간을 통해서 항상 이익을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4. 이것에 대해서 새로운 경영 의식으로서는(수익)-(이익)=비용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비용이 있는 그달의 예상 수익금을 우선 결정해 두어 한층 더 공제적으로 이익을 상정하고 공제해 이것으로 비용을 계산해 둔다.

이것을 실행하면 무엇에 얼마 걸릴까 세부 계획을 할 수 있음과 동시에, 지출도 관리할 수 있다. 즉 앞을 예측해 합리화해 개선을 제대로 실시하는 것이 경영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상이 토미죠우가 자신이 개발한 요지이기고, 특히 지론으로서 역설한 점은 「이익의 한계와 손익 분석점」,「생산성 향상」의 두가지 이었다.
이익의 한계와 손익 분석점이란, 매월의 매상을 설정, 그 중에서 가능한최대의 상정 이익의 산출로부터, 고정비와 변동비를 공제해 채산점에 이르고 있는가를 계수적으로 관리한다.
한편, 생산성의 향상과는 생산고/투자액에서 분모(투자)가 적고, 분자(생산)가 많으면 생산성이 좋은 것이다. 생산성의 향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공장의 근대화, 합리화와 동시에 노사가 일체가 되어 「좋고, 싸고, 빨리」를 염두에 품질의 향상, 코스트의 인하, 소비자에게의 서비스를 실시할까이다.
물건을 만들려면 설비가 필요하며 적은 설비로 많은 생산을 낳는 것이 생산성이 높은 것이다.

측정을 산출하는 방법으로서는 서적도 많이 나와 있지만 요점은 실행으로 옮기는 일이다. 실행이란 「용기와 노력」이지만 굳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제일 가까운 곳으로부터 실행으로 옮기면 된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입고있는 옷을 벗으면 일정한 곳에 걸어 두고 언제라도 곧바로 입을 수 있도록, 공장으로 말하면 공구를 사용하면 원래의 곳에 놓아둔다. 요점은 적은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주는 것으로 기업의 대소는 문제점이 않된다.

―――그리고 약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론적으로도 설득력을 가지며 게다가 착안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이라고 하는 입장을 생각해 자기의 체험을 기본으로 경영방침을 정리한 점이 그야말로 선대 사장·코하라 토미죠우의 경영 철학인 것이다.

경영자에게 있어서 자기의 신념은, 역시”인생”그것이다. 설비 투자에 대해서의 과잉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토미죠우는 자신 4살 때부터 파산, 부모와의 이산이라고 하는 괴로운 체험을 맛보고 있었다.
파산은 사회적 죄악…이라고 생각을 해 왔으며 또한,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들어오는 것을 재고 나아가는 것을 제지한다」가 요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직접 얻은 독특한 금전 감각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견실하게, 성의를 담은 경영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 코하라 토미죠우의 경영 세계인 것이다.

제19화 –
일·사람·카와구치를 사랑한 생애

여기에 토미죠우에 대해서 보내진 표창장, 감사장의 일람표가 있다.
그것은 1950년부터 1966년의 16년간에 24번의 많은 표창장이 있다.
또, 그 내용도 교통 안전에의 공헌(가와구치 교통 안전 협회), PTA 회장의 공적(가와쿠치 공업 고교들장), 카와구치 육교의 건설(가와구치 시장) 「녹십자은장」(전일본 교통 안전 협회장), 중소기업 진흥(사이타마현 지사), 「훈 5등 서보장」(내각총리대신) 등 다양한 범위에 걸쳐서 있다.
토미죠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서 코하라 카네오씨는「정열적인 노력가 였습니다. 경영자로서 우수한 것은 선견지명이 있던 것이며 자신의 체험에 비추고, 모든 면에서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고생하고 있는 만큼 상냥함이나 배려도 있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같은 이나다 타쿠미씨는 「어려운 반면, 애정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사장은, 숫자에 밝고, 자주 앞으로의 전망등을 대화 하였으며 사장은 나를 귀여워해 주었습니다. 친아버지 같이 느끼고 있어요…」라고 가슴 속 깊이 말해 「어쨌든 사장으로서 항상 앞을 보고 있었어요. 현재의 이 본사 공장을 만들어 KHK 표준기어의 판매가 오늘의 발전의 기초가 되고 있고 그러한 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다 공장의 토지를 입수했으며, 공해와 환경 문제가 되기 전부터 준비를 해왔었기에 더욱 더 절실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요네하라 히데키씨는 「 아직 30세도 안되는 젊은 기술자에게 설비나 앞으로의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혼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함께 식사를 할수 있게끔 신경을 써 주었습니다. 정말로 애정이 세심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코이즈미 마사오씨(사이타마 기계공업(주)사장)은 「기술자이지만, 스스로 경리의 공부를 했고, 항상 누구보다도 먼저 앞서가는 사람이었습니다.또한, 여러 사람에게 기술을 가르칠 때에도 항상 겸손하게 ”내가 체험한 것이 이러한 것이야”라고 설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매우 알기 쉬웠고 많은 참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역대의 사장중에서도 그 지도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카사 키요나오씨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미상의 방”에 안내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이 방은 경영에 대한 것을 혼자서 생각하는 방. 이런 방에 안내 된 것은 처음이므로 깜짝 놀랐습니다. 단지 생각하고 있는 것 뿐만이 아니라, 차분하고 신중이 생각하고 나서 실행으로 옴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머그(스위스제의 형삭반)를 구입할 때도, 이 기계를 구입하면 어떤 효과가 있고 얼마나 설비가 근대화 할까를 잘 연구하고 나서 매입하였고, 또한, 그것을 도입하면 기어의 전문 메이커로서 얼마나 기술력이 향상하여 경쟁력도 강해질까를 제대로 간파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경영자에게 요구되는 제일 중요한 일은 설비, 경리, 영업과 모든 밸런스를 보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 경영의 ”감”이라는 것은 기업을 운영할 때에 가장 필요로 하지만 이러한”경영의 감”도 띄어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기업 진단의 전문가다운 인물평을 말하고 있다.

토미죠우의 경영이념, 특히 기업과의 관련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1959년 발표한 「기업과 인간」(전출·카와구치 기계공업 협동조합간)이라고 하는 소책자로부터 그 요점을 적어 보자. 생각의 일단을 알 수 있다.
1.기업은 자본금과 소수, 또는 다수의 인간으로부터 구성이 되어 있다. 기업은 거기서 일하는 사원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임금을 지불하며, 거기에 일하는 종업원은 그 일을 통해서 사회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 그런 만큼 기업은 공적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기업을 구성하는 사람은 경영자, 자본가, 종업원에게 3분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과 경영자는 삼자로서 있어야 되지만 이체로 되어 있다. 형식이 주식회사로 되지만 왜 이익처분을 하여 주주에게 배당해, 이익 준비금 적립을 하고 있다. 거기서 혼동 하기 십상인 것은 동족회사의 경우이지만, 자본과 경영이 하나이기 때문에 경영자 자신의 이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여기서 정확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기업의 수입금은 어디까지나 기업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경영자 자신을 위해서 사용이 되었다면 사용된 금액만큼 그 기업은 발전이 늦어지게 된다.
따라서 기업 회계와 개인 회계는 절대 나누어서 해야 한다. 작은 소기업이라도 기업은 공이며, 경영은 개인이며, 그것을 혼동 해서는 안된다.
3. 기업도 하나의 단체이며, 경영자, 종업원은 기업 전체를 잘 돌아 가도록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기업은 생산성의 향상, 합리화, 과학적 경영 등에 항상 유의해 거기에 빠르게 대처해 종업원의 임금을 인상해 소비자 서비스를 하면 정당한 이익을 얻는다.
다음으로 종업원의 성격과 생각을 서로 시정이 필요하다. 이 경우, 어디까지나 기업 전체를 대조로 한 생각, 비평이 아니면 안된다. 반대로 개인을 먼저 생각하고 비평을 하면 거기에 감정이 얽혀 거의 개인적 욕망에 끝나 버린다.
동업자의 조합도 잘 결정을 하게되면 많은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금융관계가 쉬워진다. 경제의 정보를 모아 조합원에게 제공할 수 있다. 또는, 조합원이 기업을 진단해 조합원 전체의 기업체질을 개선하고 근대화를 잴 수 있다. 타지역의 산업, 외국 산업에도 이겨낼 체질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타인은 아무래도 좋고, 자신의 기업만 좋아지면 좋다고 하는 의식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도 벌써 약 20년전에 쓰여진 문장이다. 오늘의 어려운 경제 환경속에서 실로 느낄수 있는 중요한 사고 정신이다. 그것은 토미죠우가 얼마나 일을 사랑해, 또한 사람을 사랑해, 카와구치를 사랑하고 있었는지 주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
코하라 하구루마공업주식회사의 창업자·코하라 토미죠우는 1966년 7월 26일, 영시 54분 간경변으로 조용하게 불귀의 손님이 되었다. 향년 59세. 아직 회사를 더욱더 번창시킬 수 있는 경영자로서 아까운 인생이었다.

고별식은 8월 2일.코하라하구루마공업 주식회사, 카와구치시 교통 안전 협회, 카와구치 기계공업 협동조합의 합동 장의로서 거행해졌다.
당일은 한 여름의 8월.흐린 하늘 이지만 찌는 듯이 더운 날이었다.
도로에는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꽃다발, 그리고 슬픔의 이별 참석자들이 열을 이루었다. 오전 10시 다섯 명의 승려의 독경과 함께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장의 위원장의 오노시장, 쿠리하라 당시 시장, 오이즈미 카와구치 상공회의소 회장, KHK 표준기어 대리점 회장 오치아이 지로우 사장, 나가세 주물 공업 협동조합 이사장, 이와이 카와구치 기계공업 공동 조합부 이사장을 시작해 그외 20여명의 유명분들이 참석했다.
기계 업계, 산업계, 거래관계, 반상회, 친우, 전종업원과 조용하게 계속 되는 분향의 열례. 영정의 가까운 곳에는 마치 그 가슴에 붙진 것처럼 「훈5등 서보장」이 놓여져 있었다.

– 제20화 –
지역사회에
완수한 공적

토미죠우의 반생은 기어와 함께 산 인생이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공직, 직무를 역임, 지역과 사람들에게 힘쓴 반생이기도 했다.
토미죠우가 최초로 취임한 직무는 1942년 6월에 취임한 사이타마현 남부 기기 가공 수리 공업 조합(기계 조합의 전신·카와구치 기계공업 협동조합의 개칭명)의 이사이다.

전후, 사업 재개가 전망이 서면서 1947년 3월, 카와구치 서부 기계 기구 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취임, 1950년에는 같은 조합을 발전적으로 해산해, 카와구치 기계공업 협동조합이 되면서 같은 조합의 이사를 3기에 걸쳐 중임해, 1957년 5월에 부사장이 되었다. 2기 중임의 중에도 1958년 2월, 이사장으로 취임, 같은 조합의 발전에 힘썼다.
특히 이사장 재임중은 염원이었던 기계 센터를 1960년 11월 8일에 완성시켰다 .
이사장으로서 토미죠우에 도착한 코이즈미 마사오씨(사이타마 기계공업 주식회사·사장=육대 조합 이사장)는 「선대의 이사장은 조합에서 앞으로의 기업은 자신의 회사를 분석해, 그것을 파악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원가계산이라면 그 중요성을 잘 조합원에게 설득을 받아야 한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또한,「이사장으로서는 백점 만점이었습니다. 분명히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는 좋은 시대로 모두 여유가 있었던 시대입니다만, 중소기업의 융자의 문제 등은 선두에 서서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조합원의 회사를 잘 살펴봐 주었다. 이사장이라고 하는 직함을 떼어 부담없이 자신의 체험을 근거해 이야기를 자주 하고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토미죠우는 1951년 4월, 카와구치시 의회 의원으로서 처음으로 출마 해 당선하여.그 후 3기 연속 12년에 걸쳐서 카와구치시정에 참가하여 높은 식견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시의 발전과 시민의 복지에 기여했다.
특히 1949년 4월부터 2년간, 13대째의 부의장으로서 의회 운영의 원활화에 힘쓰고 있었다.
당시는 공업의 발전에 따라,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 일례로서는 니시카와구치역의 설치, 지방도로 시라코선 카와구치 육교의 건설, 카와구치역 정비, 치수 대책 등 수많은 범위에 이르고 있다.

사토 미키오씨(야마후지 공업 주식회사·사장)는 「코하라씨는 카와구치시민중에서도 가장 교통 안전에도 힘 다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자동차를 좋아했고 교통 문제에는 전력으로 임하고 있었습니다.
전후, 아직 교통 안전이 이렇게 큰 사회 문제가 되기 이전에 그 중요성을 안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전부터의”트럭 조합””자가용 자동차 조합”을 일관하여 1949년부터 초대회장으로서 취임했습니다. 이후는 신호의 설치도 사이타마현에서 제일 최초로 움직인 사람, 자비로 안전기를 설치하거나 10일을 교통 안전일로 결정하고 기를 세워 시내를 순회하기도 했다. 분명히 전일본 교통 안전 협회에서”녹십자은장”을 받았을 것이에요」라고 가슴 속 깊이 말해 주었다.

특히 「현재와 같이 시로부터 조성금이 나오는 시대와는 달라 당시의 교통 안전 협회는 모두 자기의 도시락으로 자원봉사 활동을 하여 많이 성격이 바뀌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카와구치는 공업의 마을 입니다. 옛부터 차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선 안전을 지키는 것이 시의 발전, 시민 한사람 한사람의 행복하게 연결되는 것을 간파해 스스로 선두에 서서 운동을 추진한 점이 휴머니스트로서의 면목이 약여 하고 있었다.
이 점은 기계공업 조합의 경우에서도 가장 먼저”급식 센터”설립을 제안 실행하고 있는 것에 잘 스며 나오고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공직, 직무를 갖고,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이러한 활동에 의해 내각총리대신(사토 에이사쿠)로 부터「훈5등 서보장」을 받은 것을 첨가해 둔다.

제21화 –
언제나 뒤에서 뒷받침 하며 토미죠우를 지킨 아내 후대

토미죠우의 아내 후대. 토미죠우의 인생은 아내인 후대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으며,그것은 코하라가와 코하라하구루마공업에 있어서도 같을 것이다.

후대는 1906년, 이루마군 토미오카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토미죠우와는 1933년 5월에 결혼하여 아들 3명과 딸2명을 길렀다.
1935년에 토미죠우가 독립한 이래, 언제나 뒤에서 음과 양으로 토미죠우의 일을 뒷받침 해왔다. 창업시 융자한 빚의 상환을 위해서 토미죠우와 함께 침식을 잊고 일만을 하여 오늘의 주춧돌을 만들었다.

전후의 혼란 기에도 토미죠우의 일을 거들면서 5명의 자식의 양육.
그리고 회사의 성장과 동시에 늘어난 토미죠우의 공직이나 현직, 그 어느쪽의 경우에도 후대는 배후자로서 토미죠우의 일을 뒤에서 떠받쳤다.

여기에 1866년 5월 14일자 일간공업신문의 연재물『내조의 공』으로 후대을 다룬 기사가 있기에 소개합니다.

코하라씨의 신변의 전부를 돌보아 준 것은 후대 부인의 역할. 새빨간 차를 몰며 조합사무소인 사이타마현청에 바쁘게 뛰어다니는 남편이기에 부인의 걱정도 많다.

몇년전에는 그 고장의 부인회등도 참가하고 있었지만 요즘은 완전한 가정주부로서 가정의 일만을 몰두하고 있었기에 코하라씨가 부재일 경우는 손자가 상대 해줄 뿐, 부부가 식사를 함께 하는 것도 거의 드물었다 「마치 가족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후대 부인은 조금 쓸쓸한 마음을 털어 놓고 있다.

그러나, 지금이야 말로 가정부인으로 안정되어 있지만, 창업 시대는 기름 투성이가 되어서 일의 뒷받침을 했다고 한다.「4자 선반 1대로 남편과 둘이서 시작한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부인의 표정에는 고난을 함께 한 남편에 대한 신뢰감과 자신이 넘치고 있다. 코하라씨는「점수를 붙인다면 50점이상. 혹시 그 이하였으면 벌써 헤어졌어요」라고 웃음을 짓는다.

1년간에 2억엔 가까운 매상(그당시)을 올리는 오늘의 코하라기어공업의 기초를 만든 것은 내조의 공이 없이는 올릴수 없는 실적인 듯하다. 부부는 같은 띠의”백마 띠”의 59살. 「좀더 가족단란의 시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만」이라고 이것만이 후대부인의 고민이라고 한다.
후대부인을 이야기로서는 딱 어울리는 소개 기사이다.

이나다 다쿠미씨는「조금 서투른 기술자 보다 뛰어난 기술을 지닌 부인이었으며, 어떻한 싫은 일이 있어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하라 카네오우씨는「언제나 부지런한 부인이었으며, 어떻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선대의 사장이 지금의 회사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과 많은 공직과 현직을 해 올수 있었던 것도 내조의 공이 크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시집간 장녀와 차녀에게도 아버지의 추억을 들었을 때, 마지막으로 한말로「확실히 아버지는 훌륭했다. 또한,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한 일의 대부분은 어머니의 공적이라고 해도 좋다. 거의 부재중인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정의 지켜준 사람…」이라고 이구동성에 강조하며 말하고있다.

그 훌륭한 아내인 후대는 1964년 10월 17일 그 생애를 편안하게 닫았다.

제22화 –
일·사람·카와구치를 사랑한 생애

코하라 세이지(차남)
자동차, 카메라, 8밀리 카메라등을 좋아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에 흥미가 있었던 아버지 이었습니다. 특히 자동차를 매우 좋아해서 언제나 새로운 차를갈아타서면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기계의 기술자 이면서도 조금의 고장이라도 스스로가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운전중에 사고를 냈을 때도 차를 그대로 버리고 올정도로 귀찮은 일은 아무것도 하지않는 아버지이었습니다.

이러한 반면, 대단히 꼼꼼한 아버지로 자신이 회사를 일으킨 이래의 여러 경영 경험을 정리해서 기록으로서 남겼습니다. 게다가 항목별로 분류하여 자신의 코멘트도 적어 있습니다. 특히 숫자에 대해서는 정확한 아버지이었습니다.

저는 현재, 총무의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아버지가 남긴 데이터를 그대로 사용하여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영역을 하루라도 빨리 달성하고 싶습니다.

코바라 쇼우지(삼남)
저는 어렸을 때 몸이 약했으며 아버지는 그 것을 대단히 걱정했다고 듣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추억으로서는 아버지가 형들의 어린 시대와 다르게 회사 일이 너무나 바빠서 대부분 부재이였기에 얼굴조차 접할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로부터 학교의 교지나 운동회등도 거의 아버지가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릴적에는 조금은 쓸쓸 했습니다.

일에 관해서는 대기업상대의 일과 지역의 중소기업상대의 소위 임가공으로 60%, 표준기어를 40%의 배분으로 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있었을 때는 대체로 이 비율로 일을 해 왔지만, 현재는 그 반대로 되어 버렸다. 표준기어의 종류도 약 1500종류로 늘어났고, 혹시 아버지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의지를 이어받아 견실하고 착실하게 회사를 도욱더 발전 시키는 것이 아버지에게 대한 은혜라고 생각됩니다.


코하라 게이코(현·사장부인)
1961년경, 제가 시집왔을 때, 나카초공장과 니시키초공장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므로 아버님은 매일 왕복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나카초공장에서 밤 늦도록 일을 했을 경우는 자주 저의 집에서 야식을 드시고 언제나 밝은 미소로” 아주 맛있었어”라고 해주셨으며, 정이 많고 따뜻한 아버님이었습니다.그런 아버님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다카하시 키쿠에(장녀)
일 하나만의 외곬 인생으로 대단한 노력가의 아버지이었습니다. 저는 5년간 아버지의 일을 도와 일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도다씨 아래에서 경리의 일을 하고 있었기에 형제중에서도 가장 아버지와 상대할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고 생가 됩니다.

기억에 남는 추억으로서 1961년경, 제가 결혼하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가정, 회사, 장래를 밤 늦도록 이야기하고 있었을때,어머니에게”적당히 하지 그래요”이라고 꾸중을 들었습니다.
또한, 아버지는「너도 결혼 할 시기이기에 상대자에 없으면 내일 부터라도 등에 결혼상대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써서 다니라고 농담도 하기도 했습니다. 성격면으로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아버지는”너가 남자라면”라고 자주 말하기도 했습니다.

결혼하고나서도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되는것이 가장 걱정이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966년의 3월에 결혼을 했고, 그 4개월후에 아버지가 타계 했습니다 ….
지금도 살아 있었으면 지금의 일을 아버지에게 평가받았을 거라고 절실히 느낍니다.


모토하시 가츠요 (차녀)
수염이 짙은 아버지에게 자주 안겨서 뺨을 부벼서 매우 아팠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아픈 추억이라고 하면 또 하나, 아버지는 자주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며, 저를 무릎에 안쳐, 다른 사람과의 이야기에 몰두하여 담배 불이 저에게 떨어져서화상을 입은 적이 있습니다.그 때의 상처 자국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저는 막내 이었기에 초등학교정도까지 아버지의 무릎에 자주 안겨서 어느 형제보다도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제가 세상 물정을 알정도로 성장 했을때는 아버지와는 거의 이야기할 기회도없을 만큼 회사의 일과 조합의 일 때문에 바쁜 아버지이었습니다.

정말로 13년전의 일이 어제의 일로 생각이 듭니다. 59살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다니 ….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너무나도 유감 스럽습니다.

제23화 사장의 추억

요네하라 히데아키(제조부 차장)

저는 회사가 비약을 시작한 1957년의 가을에 입사 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4월에 선대의 사장에게 중매의 덕분에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면으로 배려를 해 주었떤 사장이었습니다.
30의 나이로 오사카에 잘 와 주었다고 기술사의 한명으로 소중히 대하여 주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간사이에 출장에서 돌아올때, 이타미의 공항에서 비싼 송이버섯을 사주시며”어머니에게 가지고 가라”로 해준 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독신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을 때, 일요일에는”요네하라군 잠시만 이야기가 하고 싶다”라고 방문해 주셔서 회사의 장래와 이제부터 어떤 기계를 도입하면 좋을가 등등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걱정등의 생각을 들려줬습니다.
시회의원등의 공직도 맡고 있었던 사장이었으므로, 사회적 지위부터 배어 나온 사회관을 가지고 있어 보통 철공소의 사장과는 관념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야나가와 도시카쓰(업무영업 과장)

선대의 사장은 솔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사람으로 가끔은 사장님의 말투를 싫어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정이 많고 특히 종업원에 대해서는 배려가 갑절한 사장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저는 야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수학 여행비의 50엔이 없어 고민고민하여 용기내어서 사장님께 말했을때 의외로 간단히 승락해 주시면서 「조심해서 다녀와라」라고 걱정 까지 해 주셨던 것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시이 마사오(영업 과장)

보통 사장이라고 하면 의젓하게 태세를 취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선대의 사장은 젊은 우리들의 의견이나 사고방식을 열심히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셨습니다.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 연령적으로 젊은이의 입장을 알려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라고 생각합니다.
나가이 세이지(업무영업 주임)

16나이로 입사 하였으며 처음에는 스승님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언제 까지도 무서운 인상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추억으로서는 5시에 일을 마치고 스승님 보다 먼저 목욕해서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고, 또, 야근의 때 밤중에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어서 꾸중을 듣거나 …. 늘 꾸중을 들었던 것이 제일 인상에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선대의 사장은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와무로 츠기오(업무영업 주임)

입사한지 얼마 안 될 때입니다. 야근중에 꾸벅꾸벅 졸음이 올때도 가끔 사장님은 잠옷 차림으로 오셔서 “졸리운가 “라고 하며 “이것이라도 마시고 기운을 내라”라고 주전자에 술을 넣어서 가지고 와 주었습니다. 사장님의 은정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실패 담입니다만, 입사한 그 날로부터 기계를 담당했으며, 그 기계로부터 기름이 흘러넘치고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기름이 흘러넘치고 있어”라고 해서 당담인 제가 ”흘러 내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 부르지 말고 스스로 처리하면 되지”라고 혼자의 소리로 말 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 그 사람이 사장님 이어서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사장도 신입사원이라고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완고한 사장님은 자신이 말한 것을 관통하는 사장이었지만, 은정가로 지금 살아 있었으면 노다공장의 지금의 모습을 보며 매우 기뻐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의 여러분에게

「기어외곬」코하라 토미죠우가 걸은 길, 사진집, 동영상을 보아 주셔서 대단히 감사 합니다.
코하라하구루마 공업주식회사의 역사, 창업자인 코하라 토미죠우, 부인인 부대가 걸은 길을 전달할수 있어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기어외곬」은 창업자의 13주기 (1979년 7월)에 프로젝오건사의 스미요시씨가 제작한 저서를 기념으로서 2대째 사장인 코하라 신지씨가 발행한 것입니다.

또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보는 역사」는 창업자가 사진기, 촬영기(8mm), 녹음기등의 취미를 가지있어 많은 기록을 남긴 것으로 창업자가 촬영한 사진을 스캐너에서 읽어내고, 동영상은 35, 16, 8mm 필름으로부터 비디오로 편집한 것입니다.
이번 새롭게 리뉴얼한 KHK 웹사이트에 「KHK의 역사」를 개설하고, 많은 자료를 정리하는 것으로 창업자의 위대함을 재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창업자의 부부는 우리들 가족이나 사원에 대하여 많은 애정으로 접해 주었으며, 항상 현장의 극명을 기록해서 장래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명확히 분석, 기록, 계획이 실천되어진 경영자이었으며, 존경하는 아버지, 어머니 이었습니다.

창업자가 남긴 경영에 대한 많은 자료들은 현재도 이용이 되는 귀중한 내용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계산방식이 주판으로부터 전자계산기,그리고 PC로 변하면서 처리 스피드가 오르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사원, 구입처, 고객과의 관계, 경영에 대한 사고방식, 사회 봉사 등은 본보기가 되는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3세대째,그리고 장래의 4세대째의 경영자가 창업자의 생각이나 의사를 이해하고 계속해서 코하라하구루마공업 주식회사 창업 100주년을 목표로 고객께 더욱더 안심하고 사용하여 기쁨을 받는 제품을 제공할 수 있는 회사로 남기를 바라고, 또한, 사진, 8mm 영상으로 사원여행의 여러분의 미소가 언제까지라도 계속되기를 기원 합니다.
2009년 8월 KHK역사제작 담당자